9.
민선배의 본토인 유교과도 이렇게까지 물이 흐려지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우리 체육과에서 한방이를 낳아준 엄마를 대변하네 마네 민선배를 상상으로는 수십 번도 더 쇠고랑을 채웠는지. 이제야 목구멍에 턱 막혀있던 의문이 해소가 됐다. 피해자가 틀림없다고 본인들이 그렇게도 옹호했던 당사자가 바로 이 체육과 재학생이었는데 말 안 해도 뭐.
맞다. 어차피 이미 다 까발려진 마당에 까놓고 말해서 체육학과 2학년 김여주가 그 주인공이었다는 거다. 아무리 한국대에서 가장 군기가 심한 체육과라고 할지언정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꼴에 동지애는 있는지 여주의 선배이자 현재는 졸업하고 떠난 작자들이 퍼뜨린 소문이 아직도 이곳 체육과를 떠돌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체육과가 민선배만 보면 그렇게 혈안이….
어제 여주의 상태가 만취였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의문이긴 하나 컨트롤하기 힘든 상태였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하지만 그런 여주가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어르고 달래며 데리고 간 민선배에게 풍긴 진한 연상의 향에, 여주 언니… 일찍 결혼하긴 했어도 헛살았던 건 아니구나… 시집 하나는 잘 갔구나… 체육과 학생들은 저마다 목구멍을 막고 있던 응어리 따위 시원하게 뱉어버렸다.
이제 한방이를 전담하게 된 민선배의 본토, 유교과만 그 뒷감당이 남았다. 그 문제는 후에 다시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지금은 잘 준비가 되도록 여주를 돕는 게 급선무였다. 윤기가 나사가 반쯤 빠진 여주를 침대맡에 앉히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얼핏 스친 여주의 살결에서 느껴지는 열감에 현재 여주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가 예상이 됐다.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무거워진 눈꺼풀과 씨름 중인 여주를 바라보며, 버드키스를 퍼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야. 씻고 자자."
"선배. 나 오늘 진짜 억울했어요."
선배에 이어 존댓말, 이단 콤보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때려 박은 여주에 윤기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혼인 신고서에 지장을 꾹 찍은 이후부터 듣기 힘든 호칭이었는데. 존댓말은 말해 뭐해. 윤기의 머리 위에서 사는 여주인데. 남편을 야라고 부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3년 만에 입에 댄 술의 여파는 대단했다. 선배라는 호칭 한 번에 연애 초반의 감정을 되새김질하게 된 윤기는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한방이가 잠투정이 심하다고 했던 말은 애초에 여주를 집에 불러들일 미끼였다. 그 한방이는 진작 잠에 들었다.
"같이 씻을까?"
아이처럼 두 팔을 뻗는 여주를 일으켜 세워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윤기의 손을 거쳐 입혀졌던 잠옷들은 이번에도 윤기의 손을 거쳐 하나씩 벗겨졌다. 여주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는 숨결은 그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10.
뒤늦게 여주의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이 모든 소식을 한꺼번에 접한 체육과는 하루에 받아들일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이미 오버가 됐어도 대체로 축하해 주는 분위기였다. 반면 유교과의 분위기는 우중충하다는 수식어가 딱이었다. 힐긋 윤기와 한방이를 번갈아 눈치 보는 시선들에 긴장이 가득 실렸다.
"거기 뭐야."
"… 죄송합니다. 잠깐 병원을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의 손끝이 윤기를, 더 정확히는 윤기의 품에 있는 그 작은 생명체를 가리켰다. 몸집도 작은 게 어찌나 땀을 많이 흘리던지. 숨소리도 고르지 못한 게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결석 처리될 텐데."
"상관없습니다."
윤기의 절박한 표정을 교수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처음 보았을 것이다. 윤기가 개강 전 따로 교수를 찾아와 강의실에 아이를 데려와도 괜찮냐 부탁할 때도 저런 얼굴은 아니었는데.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교수가 한발 물러나 주었다.
"그 아이 진료 끝나면 진료서 떼어와."
다시 말해 그걸로 어떻게든 결석 처리 안 되게 어찌어찌 힘써보겠다는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던 윤기는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어가며 교수를 향해 몇 차례 목례를 하고 나서야 강의실을 나설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도르륵 소리가 울릴 기세로 눈동자를 굴려대던 동기들 틈으로 학생 하나가(이름은 박유린이란다.) 펜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을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시선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었다. 타이밍이 참 뭣 같게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의 사건이 바로 오늘 터지고야 만 것이고.
이딴 분위기에 수업 흐름이 다시 잡힐 리 없었다. 수업에 차질이 생겨버렸는데. 이 상황에서 웃는 게 더 말이 안 되긴 했다. 무엇보다 저딴 게 출석 인정이 된다는 게… 순간 유린은 제 두 귀를 의심했다. 가뜩이나 번번이 애 데리고 수업 들어오는 거 거슬렸는데. 이건 뭐 동정인지 편애인지….
'유교과' 교수의 직업 정신을 한참이나 잘못 이해한 유린을 시작으로 유교과의 부당 대우에 대한 소문이 스리슬쩍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소문의 중심에는 이번에도 역시 윤기가 있다.
11.
윤기와 여주, 그리고 한방이. 이 셋의 관계가 아무래도 남들이 생각하는 평범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을 멀다 보니 시시각각 파생되는 소문으로부터 무사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여주와 한방이는 그 소문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대부분 윤기의 선에서 해결이 됐던 편이라 말을 얹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여주가 유교과 부당 대우에 관한 소문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었다. 에타라는 어플을 깔아본 게 그 화근이었다. 하도 동기들이 익게 익게 외쳐대니 궁금했던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땐 익명 게시판에 또 다른 글이 올라온 뒤였다.
아이 동반 등교 반대 서명 운동 준비 중│익명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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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다들 아실 겁니다.
제목에서 지칭하는 아이가 누구인지.
오늘 오전, 수업을 듣던 와중 아이가 응급실에 가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수업 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거슬리긴 했었으나 그러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수업 분위기는 말 그대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사유가 출석 인정이 된다더군요.
입원 혹은 가족의 부고가 아닌 이상 출석 인정이 되지 않는 교내 규칙이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비슷한 일로 결석 처리가 된 학우분들은 뭐가 되나요.
눈 감아주는 것도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책임지려는 부모된 도리는 인정하나,
제 시간과 등록금은 대체 누가 책임져주나요.
현재 저와 뜻이 같은 동기들과 함께 아이 동반 등교 반대 서명 운동을 준비 중입니다. 여러분도 의견을 모아주세요.
좋아요 78 댓글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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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어는 진짜...
ㄴ 말 얹기도 싫다
ㄴ 다 사정이 있을 텐데..ㅠ
인류애 다 뒤졌네
ㄴ ㄹㅇㅋㅋ 애가 응급실에 갔다는데 이딴 글 처올리는 심보에 감탄함
ㄴ 글쎄요. 저는 길게 보면 이게 맞다고 생각되는데요. 감정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ㄴ 와 여러모로 대단하네 엉덩이로 박수 갈기는 중
ㄴ 타 과 학생이신가요? 직접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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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도 아니고 유교과에서 이 지랄 떠는 게 진짜 코미디다. 안 그래요, 언니?"
여주가 눈에 불을 켜고 폰 속 화면을 정독하길래 곁눈질로 슬쩍 같이 정독한 여주의 옆자리 동생 하나가 먼저 이 정적을 깼다. 와 어떻게 이런 쪽으로 머리가 굴러가지? 고개까지 내젓고 있을 때 이미 여주는 모든 짐을 챙겨들고 강의실 뒷문을 활짝 열어젖힌 뒤였다.
"어디 가요! 금방 수업 시작인데!!"
"오늘 나 학교 안 왔다고 말해."
실제로 여주의 출석표가 결석에 체크가 되고 있을 무렵, 한 템포도 쉬지 않고 도착한 곳은 응급실 앞이었다. 마침 진료를 마치고 수납 중이던 윤기의 옆에 꼭 붙어 서서 제 얼굴만한 사탕을 입에 물고 있던 한방이가 그 누구보다도 빨리 엄마를 발견했다.
"어마!!"
그 짧은 다리로 참 열심히도 달려간 한방이가 여주의 품에 냅다 자신을 던졌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막대 사탕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품에 쏙 들어온 그 작은 생명체가 온몸으로 느껴지고 나서야 여주는 몸에 긴장을 풀었다. 맞다. 누가 뭐라 떠들든 엄마는 엄마였다. 여주에게는 응급실이라는 그 단어 하나만 눈에 들어왔던 거다.
"… 몸살이래."
"…."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수액 맞고 방금 막 퇴원…"
"고생했겠네, 오빠. 오빠도 놀랬을 텐데."
"… 여주야."
"설명 더 안 해줘도 돼. 한방이만 괜찮으면 됐지 뭐."
정말 그게 다였다. 한방이만 괜찮으면 모든 게 용서가 됐다. 그래서 여주는 윤기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한방이는 내가 데리고 등교할게."
12.
청천벽력의 충격이 아직 채 가시기도 전에 윤기는 오늘 여러모로 논란이 많았던 유린을 마주했다. 장소는 유교과 건물 바로 뒤편. 윤기가 먼저 보자고 했다. 현재 뒷말 많은 글을 올린 작자가 유린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하늘 같은 선배고 나발이고 일단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보자는 심산으로 아니꼽게 눈을 치켜뜨던 유린의 손에 캔 음료가 하나 쥐여졌다. 곧 유린의 두 눈이 이리저리 동요했다.
"미안하다."
선배는 유린에게 준 것과 같은 음료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빈캔이었다. 유린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선배가 얼마나 오랜 시간 이곳에서 고민을 했는지가 그 빈캔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내가 네 수업을 방해했던 것에 대해."
차라리 한 대 치지. 못한다면 욕이라도 박지. 빈틈없이 완벽한 사과는 떵떵거리던 사람을 한순간에 벙어리로 만들었다. 하늘 같은 선배고 나발이고라는 말은 취소. 하늘 같은 선배라는 명칭은 이런 사람에게나 붙여야 된다고도 생각하며, 유린의 감정이 차츰 사그라들고 있을 때였다.
선배의 후배로 추측되는 남자 하나가 선배를 보고 알은체를 해왔다.
"선배 여기서 뭐 하세요? 안 그래도 저 아까 여주 선배 봤는데."
"여주를?"
"오늘 뭔 날이래요? 빨랫감을 무슨 산더미로 들고 갔어요, 여주 선배."
순식간에 선배가 한 손으로 가볍게 빈캔을 구겼다. 그 행동에 후배는 본인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인지했다. 더 나아가 여주가 들고 가던 그 빨랫감의 정체가 한국대의 오랜 골칫거리, 체대 군기의 결과였다는 것을. 멍청하게 이제야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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