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빙의글 완결 - 육아선배론 1
1.
"민윤기?"
… 알다마다요. 성은 민이요 이름은 윤기로다. 신입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교수, 선배 가릴 거 없이 정수리가 땅에 처박히도록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군기보다도 더 바짝 새겨진 게 그 이름 석 자였을 터. 재학생들 내 분위기는 이미 포화 상태인 걸 보아하니 말 그대로 민윤기 선배의 복학이 어지간히도 센세이션이란 거다.
"너 선배 존칭 안 붙이냐. 잘못 찍혔다간 너도 야…"
"…… 그 정도야?"
"말도 마. 그 선배가 순진한 여후배 살살 꼬드겨 애를 배게 했다는…"
끝을 모르고 가지를 치던 이야기는 알아서들 입을 닥치는 걸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아무렴 개강 날이자 민윤기 '선배'의 복학 디데이부터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긴 했다. 무려 뒷말은 안 해도 뻔한 그 '선배'라는 작자에게 말이다.
모조리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긴 하지만 확실한 건 민윤기 선배의 평판이 바닥을 친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여후배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놓고선 정작 본인은 휴학이랍시고 무려 3년을 얼굴도 안 비치다 드디어 복학을 한다고 하니 어련하실까.
"그 여자분은 아직 소식 없지…?"
"오리무중도 이런 오리무중이 없다. 일면식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네."
그런 작자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붙이는 게 맞을지. 딜레마에 빠지다가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선배 유교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왜 우리 체육과에서 그 선배를 못 잡아먹어서 이 사달인지.
…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2.
전설의 선배 복학 관련 소문이 일파만파 퍼진 지 한 시간 만에 모든 건 사실로 판명이 났다. 민윤기 선배의 복학 소식을 체육과 다음으로 전해 들은 유교과 학생들이 소문으로만 익히 들어봤던 그 잘난 면전을 가장 먼저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영접 시간은 1교시가 막 시작하려던 9시 정각, 출석체크 도중이었다. 뒷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긴 했지만 누구 하나 고개를 돌려보진 않았다. 제 앞가림 하기에도 벅찼던 탓에 문소리를 이어 누군가 맨 뒤, 빈자리에 앉는 듯한 소리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 이름이 거론되기 전까진 그랬다.
"민윤기."
"네."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개강의 여파로 다 죽어가던 학생들의 동태 눈깔들이 뭐라도 사냥감을 찾은 듯 번쩍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은 출석체크 중이다. 네라는 대답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마눈…"
"코-하자."
"우웅…"
… 그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까지도.
저, 저건 또 뭐람. 대학교라는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존재 등장에 수군대는 학생들 틈으로 이깟 시선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교재를 펼치는 사람은… 그 소문 무성한 민윤기 선배가 맞았다. 저 작자의 실물을 봐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선배의 품에 꼭 안긴 채 곧장 잠든 아이가 옵션으로 딸려올 줄은 몰랐다.
이미 선배에게 아이의 존재에 대해 귀띔을 전해 받은 모양인지 교수는 크게 신경을 두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가시방석인 것은 오로지 다른 학생들의 몫인 모양이었다.
대뜸 등장한 저 생명체는 뭘까. 선배의 동생? 그러기엔 선배와 너무도 대조되게 앙증맞았다. 애가 기껏 해봐야 세 살 같달까. 그렇다면 선배의 친인척인가? 그것도 아니면 뭐. 건너건너 아는 사람의 아이?
한 시간 내내 눈 한 번 뜨지 않고 곤히 잠든 아이의 동태를 파악하다가 수업이 끝이 나버렸다. 수업 내용은 일찌감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지금은 오직 한 팔로 거뜬히 아가를 안아든 채 반대쪽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살짝 웃는 선배의 모습만 눈에 들어찼다. 마침 불어온 바람이 선배의 앞머리를 잔잔히 들췄다. … 존나 드라마.
안 그런 척 귀를 쫑긋 세운 학생들의 청력이 두 배로 밝아졌다.
"밥은. 난 먹었지. … 아 한방이? 아직 자. 이따 먹일 거야. 먹일 건데 나 살짝 서운하네. 나한테도 물어봐 주면 안 되나. 좀 물어봐 주지?"
저 선배… 원래 저렇게 말이 많았나. 모두 입이라도 맞춘 듯 줄줄이 얼이 나간 사이 때를 맞춰 아이가 잠에서 깼다. 응석 부리듯 두 팔을 바둥대며 칭얼거리는 저 모습이 어쩜 저리 천사같을 수 있는지에 관한 건 나중에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고.
"압바… 어마… 엄마눈……"
일단은 들어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저 단어부터 어떻게 해석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전방 3미터 이내에서 똑똑히 들었던 그 단어를 상기하며 믿기 힘들다는 듯 저마다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내가… 시발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꿈일까 싶어 제 뺨 아리를 후리는 학생들 사이로 전설의 선배는 무던하게 입을 뗐다. 것도 제 품에서 응석을 부리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이다. 제3자들의 시선에만 낯설 뿐, 선배는 이게 일상인 듯 보였다.
"민한방. 오늘은 너 나랑 있어야 돼."
여러모로… 전설이긴 했다.
3.
아마도 추정하길 이름은 민한방. 나이는 세 살.
판이 뒤집혔다. 예기치 못한 민윤기 선배의 2세 등장 한 번에 3년간 쌓였던 평판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가의 나이와 선배의 휴학 기간을 빗대어보며 선배가 그때 그 여후배를 버리고 도망친 게 아니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직 추정을 확신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여전히 민선배를 뒤에서 씹어대는 무리는 존재했다.
"그 나이에 좆관리 제대로 못해서 애를 만든 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 새끼 말하는 거 봐."
"아니 그렇잖아. 그건 그냥 답이 없는 거야. 책임감 있는 게 아니라."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선배를 안줏거리마냥 씹어대던 놈의 대가리가 빡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씨발 뭐야. 제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긴 손바닥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재빠르게 뒤를 돌아본 놈은 곧 저보다 두 뼘이나 작은 여자를 마주하게 됐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사람을 잘못 봤겠거니 눈감아주려고 했건만, 먼저 입을 연 건 놀랍게도 여자 쪽이었다.
"다 아는 것처럼 말해요, 왜?"
"… 뭐?"
"막말로 그쪽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전공책을 한 아름 들고 서있던 여자는 소위 말해 무리에게 탈탈 털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처럼 왜소했다. 김여주. 전공책 표지에 적혀있던 이름을 확인한 무리가 저들끼리 마주 보며 낄낄댔다. 가던 길 가라 여주야? 딱 봐도 비아냥대는 어투와 덤으로 딸려온 담배연기에 발끈한 여주가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입을 떼는데. 안타깝게도 나오려던 말이 도로 목구멍 깊이 들어가 버렸다.
"2학년?"
"… 넵."
서둘러 담배꽁초를 발치에 던진 무리들이 일동 차렷 자세를 잡았다. 일렬로 칼각을 잡고 선 건 옵션이 아닌 필수였다. 눈앞에 본인들이 그렇게도 물고 뜯었던 민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아까 강의실에서 마주친 적 있는 것 같은데. 유교과?"
"… 맞습니다."
어떠한 동요도 없이 무리를 제 앞으로 불러낸 선배는 오늘 수업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며 제 뒤로 무리를 줄줄이 세운 채 자리를 벗어났다. 찍소리 못하고 선배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는 무리의 꼴을 보아하니 아무리 물고 뜯었어도 선배는 선배다 이거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좀 전까지 선배를 신명 나게 까고 있었다는 것 하나로 고개를 들 수 없는 명분은 충분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곳에 여주 혼자 남겨졌다는 것, 하나다. 씩씩거리는 콧김이 양쪽 콧구멍으로 사이좋게 뿜어져 나왔다. 나 아직 할 말이 차고 넘치는데. 웬 놈이 멋대로 상황을 끝내냐, 그런 의미로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더 정확한 요점은 쟤 지금 별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을 여기서 꺼내주기 위해 내 의사는 묻지도 않은 거지,라고 생각했다. … 존나 열받게.
4.
개강 첫날이랍시고 가볍게 오티만 이루어지고 끝난 덕이 누군가에겐 황천길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거늘…. 일찍이 귀가를 하게 된 윤기가 현관문 앞에 서서 몇 차례 심호흡을 이어갔다. 이마저도 마마, 어마 노래를 부르며 얼른 들어가자고 보채는 한방이 덕분에 멈춰야 했다.
"…."
현관과 거실 그 경계선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커튼이 쳐있는 집은 평소보다 더 어두컴컴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시선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인영으로 옮겨졌다. 그 앞 협탁에는 김여주 이름이 크게 적힌 전공책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체육학개론, 기초체력육성, 한국체육사. 괜히 교재 제목을 쭉 한 번 훑어보는 딴청도 부려봤다.
이걸 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뻔히 예고된 다음 상황을 미리 떠올려보며 난감한 듯 뒷머리를 매만지는 제 아빠를 제치고 한방이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여주에게로 냅다 달려갔다. 여주는 아직도 방금 막 집에 입성한 존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이건 말 그대로 비상이었다. 타들어가는 아빠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하게 여주의 품에 뛰어든 한방이를 바라보며 윤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그 정적 속에 이루어진 첫마디는 이랬다.
"자기야. 네가 진짜 나랑 각방을 쓰고 싶지?"
섬뜩했다. 여주의 이 말을 윤기는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뭐라도 둘러댈 말을 생각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결국, 무릎을 꿇는 시늉으로 그 첫 스타트를 끊었다.
"자기야. … 사랑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은 여주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23.01.11 - [방탄 빙의글 완결] - 방탄 빙의글 완결 - 육아선배론 2